(연재)아버지의 일기(48~50일차)

김소정 승인 2017.09.29 09:29 | 최종 수정 2019.03.18 13:09 의견 0

아버지의 일기 (48)
1951년(檀紀 四二八四年) 2월 25일(二月二十五日) 일(日) 흐림
오늘 역시 날은 흐리다.
2주일간週日刊 연기延期한 방학放學도 어느덧 풀잎에 서리 녹듯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나는 이 동안 한번 생각하여 보았다.
이 2주일週日 동안 참으로 유효有效한 생활生活 또한 모든 학과學科에 *만단萬端의 준비를 하여, 앞으로 다가오는 학기學期에 뒤지지 않은 성적成績을 하려고 결심決心하였다.
연然이나 대 환경大環境의 지배支配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인간人間인 만큼, 좀처럼 마음 잡지 못하여 귀중한 시간時間을 허송虛送하지 않았을까? 유달리 오늘은 전투기, 수송기 낮게 떠서 바쁘게 날아갔다가 돌아온다.
중식을 먹고 내일 가져갈 숙제를 찾아 정리整理하다.
그리고는 **구장區長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달빛 한 줄기 없는 어두운 밤이다.
못난 이 자者는, ‘어머님’ 보고 싶어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어 책상에 엎드려 한限없이 울며 붓을 놓다. * 수없이 많은 갈래나 토막, 여러 가지.
** 이장里長.

아버지의 일기 (49)
1951년(檀紀 四二八四年) 2월 26일(二月二十六日) 월(月) 흐림
달게 잠자던 나는 아버지의 깨움에 일어나 본즉 새벽이다.
고모님과 *밥 짓는 아이는 벌써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는 모양이다.
아침밥을 먹고 해 뜨기도 전前에 김창원 군과 출발出發하였다.
좀 산산한 날씨나 춥지는 않다.
가는 도중途中에 더워서 오버를 맡기고 갔다.
대로大路에 나선즉 전前과 같이 자동차自動車는 많이 다니지 않는다.
가다가 본즉, 상중교尙中校에는 마침 미군美軍이 보였다.
연然이나 학교學校는 추잡하고 파괴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또다시 12일 집합소集合所였던 곳에 가서 선생님들과 친구들을 만나다.
피난避難 온 타교생他校生도 왔었다.
여기서 교장校長 선생님의 훈화訓話에 납부금納付金관계를 이야기하시고 내일부터 시학始學한다고 말씀하였다. 곧 해산解散하여 돌아오다.
오는 중에 배가 고파서 몇 번을 앉았다가 쉬며 왔는지….
그리고 병룡, 정필 우리 셋은 또다시 자취생활自炊生活을 하려고 의논하였다. * 할머니 별세하시고 먼 친척 되는 불쌍하고 조금 부족한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부엌일을 맡겼다고 한다. 어릴 적 우리 집에 찾아왔었다.


아버지의 일기 (50)
1951년(檀紀 四二八四年) 2월 27일(二月二十七日) 화(火) 흐림
고모님의 새벽밥 짓는 소리 들리다.
나는 지난 함중 재학 중咸中在學中, 통학 시通學時에 춥고 캄캄한 부엌에서 밥 지어 주시던 ‘어머님’ 생각이 으스름히 나다.
아직도 날은 환히 새지 않고 먼데 사람들이 보일 듯 말 듯한 이른 새벽이다.
삼촌三寸 어른은 짐을 지시고 벌써 앞에 갔다.
나는 1학년學年 학생學生 병룡, 정필을 기다려 같이 가려고 양정楊亭 산마루에서 기다리었다.
‘서당골’에서 짐을 바꾸어 지고 김창원과 같이 걸어오는 중, 벌써 뒤이어 동생들은 짐을 지고 따라왔다.
‘짐’은 무거워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었다.
우리는 ‘만산리蔓山里’에 왔다.
연然이나 우리 학교學校에 생각도 못하였던 미군美軍이 들어와서 있었다.
우리는 기가 막혀 한참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태껏 구슬땀을 흘리고 새벽에 나섰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에 본즉, 전교생全校生은 냇가에 모여 교장校長 선생님의 말씀에 학교學校에서는 수업은 못하되, 다른 곳에서는 수업授業을 한다는 말씀에 불행 중不幸中, 다행多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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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연합뉴스=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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