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해까지만 해도 아내는 초계탕과 냉면으로 여름을 시작했다." @지리산자락 농부 김석봉
[기고= 지리산 농부 김석봉]
③
그렇게 한 나절을 끓인 육수는 김치냉장고 빈 김치통 한가득 채워놓고 더운 날 찬 음식 만들 때마다 꺼내 쓴다.
어제는 국수를 삶았다.
내게는 비빔국수를, 손녀 서하에겐 장국수를 차렸는데 비빔국수가 마치 물회처럼 질퍽했다.
이 육수를 한 국자 넣었겠지.
초고추양념장만 넣은 것보다 훨씬 좋았다.
냉면의 계절이다.
냉면만큼 쉬운 음식도 없겠다 싶은데도 좋은 냉면집을 만나기 쉽지 않다.
오래 전 진삼(진주-삼천포)국도가 지나는 사천읍 도로변에 ‘재건냉면’이라는 간판의 냉면집이 있었는데 그때 그 냉면맛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후 진주를 중심으로 ‘북엔 평양 남엔 진주냉면’이라는 출처불명의 냉면이야기가 나돌더니 우후죽순 ‘원조진주냉면‘이라는 미명의 냉면집이 나타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껏 칠갑냉면 면발에 항정살 육전 고명을 얹은 아내의 냉면보다 맛있는 냉면은 만나보지 못했다.
“이거 이 육수 만드는데 돈 많이 들었겠네?”
육수를 거를 때 곁에서 지켜보던 나는 이런저런 건더기에 놀랐다.
쇠고기 양지머리 덩어리가 나오고 토종닭이 나오고 몇 마리 황태가 나오고 표고버섯과 여러 야채건더기가 한가득이었다.
“십오만 원은 들었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훔치는 아내의 표정은 자못 엄숙해 보였다.
“허어, 참. 이 육수로 냉면 몇 그릇이나 나오려나?”
“글쎄. 스무 그릇?“
아내는 ‘그게 뭐 중요하냐’는 듯 건성건성 말을 받았다. 그러나 계산과 셈에 밝은 나는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냉면집에서 이런 육수로 냉면을 말아낸다면 냉면 한 그릇 가격이 얼마여야 수지가 맞을까.
면발값에 고명값에 식당운영경비를 더하면 한 그릇 이만 원을 받아도 남는게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냉면으로 떼돈을 버는 기술자들이라니!
어린 날 고향마을 한복판 대나무숲 언저리에 마을우물이 있었다.
샘물이 얼마나 맑고 차던지 해마다 복중더위엔 이 물을 길어 가려 물동이를 든 채 한참이나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이 차가운 우물물에 틀국수를 말고 볶은 콩가루를 푼 어머니의 콩국수만큼 맛난 냉면이 세상에 또 있을까.
지지난 해까지만 해도 아내는 초계탕과 냉면으로 여름을 시작했다.
냉면이야 마트에서 구매한 칠갑냉면 면발사리가 좀 추레해 보였지만 아내의 초계탕은 품격이 있었다.
한때는 초계탕 만들어 그렇게 뽐내기도 하더니 입추 말복이 코 앞인데도 초계탕의 ‘ㅊ’자도 꺼내지 않네.
만사가 다 귀찮은 나이탓일까. 아니면 깜빡 잊고 지나가는 것일까.
이젠 그렇게 영영 잊히는 것일까.
어머니의 콩국수 맛처럼 가물가물 지워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