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아버지의 일기(89~93일차)

김소정 승인 2017.10.23 09:13 | 최종 수정 2019.03.18 13:14 의견 0

아버지의 일기 89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7일(四月七日)토(土)맑음
나날이 온갖 초목草木들은 일시一時를 다투어 자라고 있다.
벌써 검푸른 보리들은 벌거숭이 산비탈에 한 가지 무늬를 놓고 학교學校 화단花壇에는 지나간 그 폭격에 모두 부서지고 혹或은, 흩어진 조그마한 기슭의 화단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또한, 그 초목草木들도 폭격을 피하느라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모습이, 봄이 찾아왔다.
고 살금살금 변變해진 이 인세계人世界를 보려고 잎들은 또한, 이런 꽃봉오리들을 내밀고 있다.
나는 학교學校에 가서 김한성金漢成 형의 말에 의依해 서署에 가보았다.
거기에는 죄인을 취조하는 등 여러 가지 사무계통의 사람들이 바쁘게 사무事務를 보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용무用務가 없어 곧 나오다.
수업授業을 마친 후, 작업作業을 하고 우리는 해산하여 자동차自動車에 얹혀서 집으로 왔다.
 

아버지의 일기 90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8일(四月八日)일(日)맑음
오늘은 일요일.나는 오늘 심리시험心理試驗 준비準備를 하려고 아침을 먹자 곧 앞 학교學校에 가서 외우는 중, 후배 몇 명이 왔다.
그 후, 종진鐘眞과 종원鐘員이 찾아와 화동華東 김계수金桂守 결혼식結婚式에 참하參賀103하여, 화촉지전華燭之典104을 올리기 위하여 같이 가자 하기에 도리 없어 한참 생각하다가 마음을 크게 먹고 갔다.
가본즉, 몇 친구(7, 8명)에 불과不過하였으며 또한 기념품紀念品도 준비하지 못하여 들어가기에 부끄러운 생각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기서 그 음식물飮食物이야 굉장하였다.
참으로 기쁜 날이다.
연然이나 나로서는 진정 기쁨이 없었다.
왜냐? 나도 ‘어머님’이 살아 계셨다면….놀던 중, 해는 서산西山에 떨어져 나는 먼저 혼자 출발出發하여 걸음을 빨리 하였다.
 

아버지의 일기 91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9일(四月九日)월(月)맑음
아버지의 깨우는 소리에 잠을 깨고 보니 하늘에는 총명한 별들이 이 천지天地를 비취고, 다만 부엌에서 고모님의 밥 짓는 불빛이 이 적막한 구만리九萬里 동리洞里에 반짝이고 있다.
나는 맛있게 먹고 하늘에서 비치어 주는 아기 별빛에 길을 찾으며 등에 쌀과 책을 짊어지고 나섰다.
유달리 일찍 일어난 노고지리 하늘 중천中天에 떠, 간밤에 ‘어머니’ 혹或은 임을 잃었는지 혼자 노골노골 지저귀고 서쪽 어디로인지! 서당골 재105를 넘고 보니 그 별빛도 기약 없이 자취를 감추고 먼동이 터져온다.
나는 오면서 심리학心理學 Note를 보며 외웠다.
아침은 매우 좋다.
외우는 동안 어느덧 천봉산 힘찬 멧부리106에 만산蔓山 자취집에 다가왔다.
 

아버지의 일기 92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10일(四月十日)화(火)맑음,흐림
오늘 2시時간째 심리시험心理試驗이었다.
이 시험試驗준비에 며칠간이나 힘자라는 대로 외우고 외웠다.
연然이나 그 반면反面에 시험試驗문제는 아주 딴판이다.
참으로 학술學術은 심산深山의 무궁화無窮花가 아닐 수 없다.
본교本校에 작일昨日, 미군美軍 보급선補給線 일중대一中隊가 하룻밤 유하고 오늘 6시경時頃 일보 전一步前에 ‘지프’를 앞세우고 또다시 올라가는 것이다.
이제야 완전完全한 봄이다.
담 모퉁이 이 구석 저 구석 숨었던 그 아름다운 고운 맵시를 이제야 완연完然히 나타나 이 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교下校한 후, 학습장學習帳을 정리하고 저녁밥을 맞이하였다.
‘방세稅’ 4인이 합合하여 4천환 주인댁에 지불支佛하다.
 

아버지의 일기 93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11일(四月十一日)수(水) 비,맑음
막 눈을 뜨고 밖을 나가본즉 비가 내렸다.
밖에 모든 것은 비를 맞아 매우 구슬프게 보였다.
내가 오늘은 식사당번食事當番이기에 일찍이 아침을 지었다.
요사이는 박병룡 군은 몸이 아파서 집에 가고 우리 셋이 하루의 일과日課로 싸우고 있다.
본교本校에서 조회朝會할 예정豫定日이었으나 비가 와서 그만 침천정沈泉亭으로 갔었다.
벌써 많은 친구들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날이 아무 한 일 없이 하루하루의 시간을 보내어 오늘도 언제 해가 졌는지 모르게 저녁밥을 먹었다.
우연히 우리의 인생人生 삶의 비애悲哀를 느끼다.
해는 지고 깨끗한 바람 따라 노래를 불러 보았으나 그 노래 역시 나의 만족감을 주지 않고 슬픔을 가져오더라.

(영남연합뉴스=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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