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아버지의 일기(99~103일차)

김소정 승인 2017.10.25 09:35 | 최종 수정 2019.03.18 13:15 의견 0

아버지의 일기 99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17일(四月十七日)화(火) 맑음
저녁노을 바라보며! 하숙집 텃밭 담 모퉁이에 어린 배꽃가지, 겨울 삼동三冬까지 조금도 꼼짝하지 않고 죽었던 그 가지에 차차 촉이 튼 후로 지금은 완연完然히 희고 흰 꽃잎을 벌려 웃고 있다.
그 이웃 옆에 외로이 섰던 복숭아꽃도 이제는 볼그레한 아름다운 잎을 벌려 온갖 ‘벌’이 여행旅行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우리 모르는 이 순간瞬間에도 온갖 초목草木들은 이 초춘初春을 맞이하기에 어느 곳 없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이제는 확실한 봄! 금수강산 삼천리三千里에 봄은 찾아 왔건만, 우리 평화平和의 봄은 언제 찾아올 것인가! 점점 이 세계世界의 전세戰勢는 광廣범위하게 넓혀져 가고 있다.
*‘경보警報’
동양東洋의 전투작전 총사령관戰鬪作戰總司令官이신 ‘맥아더’110 원수元首가 돌연히 이 자리를 물러가고 ‘릿치’111 중장이 이 일을 본다는 것, 대구大邱 가신 담임擔任 선생님이 오시고 본교本校에는 또 미군美軍의 보급대補給隊가 들어왔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여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6·25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 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릿치 중장(리지웨이 [Mathew Bunker Ridgway]). 미국의 군인. 버지니아 주 출생. 1917년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사관학교 졸업. 1932년 필리핀 총독의 기술 고문ㆍ1939년의 외교 사절로서 브라질을 방문하고, 제2차 대전 중 공정空艇 사단장으 로 북아프리카에서 칠리아 섬ㆍ이탈리아 본토ㆍ노르망디로 전전, 1944년 제8공정 군단 사령관 이 되어 독일에서 싸웠다. 1946년 유엔 군사 참모 위원회 미국 대표가 되고, 미국 국방 회의 의장 1949~50년 참모 차장ㆍ 1950년 제8군 사령관이 되어 한국 전선에서 활약, 1951년 맥아더의 후임으로 연합군 최고 사령 관ㆍ유엔 총사령관ㆍ미국 극동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52년 대통령 출마를 위해 사임한 아이젠 하워 원수의 후임으로 북대서양 조약(NATO)군 최고 사령관이 되고, 1953~55년 육군 참모 총장ㆍ 1955년 멜론 산업 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아버지의 일기 100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18일(四月十八日)수(水) 맑음
달게 취한 새벽 잠 속, 들리어 오는 힘찬 닭 목소리에 잠을 깨니 벌써 날은 환히 새고 창문을 열고 보니, 저쪽 검푸른 보리밭에 일찍이 거름(오줌)112 흔치로온113 일 농부一農夫 신선한 아침공기를 잠뿍114 들이쉬면서….
수학자습數學自習을 하는 동안 뒤 ‘너추리’ 마을에서는 아침연기가 무럭무럭 일어났다.
본교本校에서 조회朝會를 마치고 수업授業을 받았다.
수업授業이 끝난 후로 담임擔任 선생님으로부터 소풍消風 갈 장소場所를 결정決定하라고 하는 중, 남녀학생男女學生간에 의의意義가 분분하였다.
나는 우리 남학생男學生은 너무나 여학생女學生에게 끌리기 쉬운 그야말로 아주 유치한 상태狀態에 있지 아니한가 하는 감이 들었다.
나는 나의 성격性格에서 좀 다른 뚜렷한 의지意志로서 생활生活하여 옛날 시골에서는 오줌통에 오줌을 받아서 밭에 거름으로 뿌렸다.
* ‘뿌리러 온’의 사투리.
* 듬뿍.
가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 같다.
그야말로 아주 뼈아픈 정신적精神的 고민에서 헤매어 보았건만 그때의 그 결심決心, 지금은 어느덧 춘산春山에 눈 녹듯이 다 녹아 버려지고 마는 것 같다.
 

아버지의 일기 101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19일(四月十九日)목(木) 비
20일 새벽.
부슬부슬 비오는 소리에 밖을 내다보니 온갖 초목草木 씻어주고 자라게 하는 봄비다.
날마다 이른 아침이면, 이 동네 부인婦人네들이 물 길러 모여 서로들 여러 가지 생활生活하여 가는 온갖 재미스러운 이야기로, 이 우물의 조용함을 깨뜨리고 있으나 오늘 아침에는 언제 모두 다 길어 갔는지 다만 우물가에 춘우春雨만 내릴 뿐이다.
식사당번食事當番이다.
밥은 잘 지어졌으나 간장 관계로 모두들 맛있게 먹지 못하고 있는 중, 주인主人 모친母親께서 김치를 한 그릇 갖다 주시기에 너무나 미안未安한 생각 속에서 아침을 먹었다.
본교本校로 다녀가 본즉, 벌써 수업授業은 시작始作되었다.
하교 시下校時 담임擔任 선생님으로부터 소풍장소消風場所는 사벌면沙伐面 경천대警天臺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학생女學生 일동一同은 매우 반反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이 결정決定되었다.
내일의 일기日氣 청명하기를 빌며 곧 꿈속으로….
 

아버지의 일기 102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20일(四月二十日)금(金) 맑음
오늘은 우리 상주중학교尙州中學校 교외수업校外授業 소풍消風이었다.
모두들 한 손에 중식을 쥐고 기쁜 얼굴로 교장校長 선생님의 훈화訓話 말씀을 듣고 출발하였다.
사범과師範科의 장소場所는 사벌면沙伐面 경천대擎天臺*였다.
가는 도중途中에는 길이 좁아 각각各各 흩어져 걸어갔다.
어느덧 우리의 목적지目的地에 도달到達하였다.
내가 여기에 왔던 것은 두 번째였다.
그때는 자취 없이 흘러가는 국민학교 시절國民學校時節의 어느 날 우리들은 여기에 왔었다.
그때 온 후로, 지금 5, 6년 만에 여기를 다시 찾아와서 보니 전前에 본 그 모습 그리 변變하지 않고, 오늘날에 모든 사람들의 경승지景勝地라 일컬어 사람들의 인파人波를 부르고 있다.
우리 사범과생師範科生은 여기에서 좀 떠나 조용한 장소場所를 취取하여 미리 준비하였던, 술과 여학생女學生에게 부탁하였던 음식飮食을 놓고 오락회를 열었다.
놀던 중 호루라기 한 소리에 놀이를 마치고 정배와 같이 비춰주는 달빛에 길을 찾아 하숙집으로….
* 낙동강 경천대
· 주소: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 12-3번지.
· 면적: 209,000㎡(63,223평)
영남의 상징이자 젖줄인 낙동강이 감싸 안은 ‘삼백의 고장’ 상주는 성읍국가시
대부터 사벌국, 고령가야국의 부족국가가 번성하였으며, 신라시대에는 전국 9
주, 고려시대에는 전국 8목 중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하는 등 웅주거목의 고도로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 자리해 왔다. 또한 누란의
199 아버지의 일기 - 121일의 기록
위급한 국난을 극복할 때에도 충과 효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앞세운 수많은 충신과 지사가 있어 자랑스러운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낙동강변에 위치한 경천대는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1,300여리 물길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낙동강 제1경’의 칭송을 받아 온 곳으로 하늘이 만들었다 하여 일명 자천대自天臺로 불리는 경천대와 낙동강물을 마시고 하늘로 솟구치는 학을 떠올리게 하는 천주봉, 기암절벽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감상하며 쉴 수 있는 울창한 노송숲과 전망대, 조선 인조 15년(1637) 당대의 석학 우담 채득기 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무우정과 경천대비, 임란의 명장 정기룡 장군의 용마전설과 말 먹이통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명승지와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경천대 관광지 내에는 전망대, 야영장, 목교, 출렁다리, MBC드라마 상도 세트장, 어린이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및 식당, 매점 등이 갖추어져 있고, 소나무 숲속의 아담한 돌담길과 108기의 돌탑이 어우러진 산책로와 맨발 체험장 및 황토길이 있으며, 인근에는 ‘전 사벌왕릉’과 ‘전 고령 가야왕릉’, ‘화달리 3층 석탑’,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 장군의 유적지인 ‘충의사’, ‘도남서원’ 등 여러 문화 유적지가 있으며, 상주활공장, ‘MBC드라마 상도 세트장’(중동), 상주 예술촌 등이 있어 가족과 함께 편안한 휴식과 관광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돌탑과 황토길)로 각광받고 있다.
 

아버지의 일기 103
1951년(檀紀四二八四年)4월21일(四月二十一日)토(土)맑음
다 쓰러져 가는 우리 가산家産, 실바람이 불어와도 넘어질 나의 가산불안家産不安 어디 가서 의지할 곳 없고 말 못할 기막힌 고독비애孤獨悲哀 속에서, 이 자者는 눈물을 머금고 일기장日記帳의 한 Page를 더럽혔다.
작일昨日, 원족遠足115을 다녀온 관계인지 아침에 몸이 매우 괴로웠다.
오늘로써 이번 주일週日도 끝맺는 날인 동시同時에 주번週番도 끝마치는 날이다.
수업授業을 시작始作하기 전前에 담임擔任 선생님께서 오시어 어제 소풍消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난폭亂暴한 행위行爲를 하였다 하여 매우 대노大怒하신 얼굴로, 많은 주의注意와 심지어 눈물을 머금고 뺨까지 올리시었다.
그 후, 또다시 훈육訓育 선생님이 오시어 많은 주의注意 말씀이 있었던 동시同時에 우리들은 작일昨日, 너무 질서秩序를 지키지 않아 담임擔任 선생님으로부터 본교本校 여러 선생님들을 걱정시켰다.
곧 하숙집으로 와서 본즉, 동생들은 벌써 가고 서글픈 방만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나는 3, 4권券의 책을 찾아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운 내 고향에 가려고 이 집 사립을 나설 때, 주인主人 모친母親께서 맛있는 음식飮食을 주시어 염치불고廉恥不顧하고 맛좋게 먹고, 앞 후천교後川橋에서 자동차自動車를 타고 양정楊亭에서 내리어 힘없는 내 고향에 발걸음을 옮기었다.
집에 온즉, 그립던 누님이 오시어 반갑기도 하고 별안간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회갑回甲이 가까워오며 노쇠老衰하신 아버지, 이 못난 불초자식不肖子息을 위해 오늘도 들에 다녀오시는 것이었다.
연然이나 삼촌 숙부三寸叔父께서는 오늘도 전前과 변變함 없이 술에 마취되어, 동리洞里를 돌아다니며 나중에는 아버지와 싸움을 하시는 것이었다.
하도 기가 막혀, 누구에게 호소呼訴할 곳 없어 눈물과 함께 울음소리가 나왔다.
나는 결심決心하였다.
나의 성공成功의 날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없고 없는 까닭이다.
불쌍타!무산無産인 우리 가정家庭의 극고통極苦痛116할 일이다.
흘러간 그 옛날에 ‘어머님’의 그 사랑이 그리워 눈물로 오늘 해를 보냈다.
슬픔에 찾아와서 슬픔에 가시는 누님의 모습, 동생으로 하여금 눈물짓게 하누나!
* 극히 심한 고통苦痛.

(영남연합뉴스=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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