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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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0:15 | 최종 수정 2019.03.1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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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일기 114
1951년(檀紀四二八四年)5월7일(五月七日)월(月)맑음
온갖 초목草木들의 봄소식을 알리어주는 그 노란 어린 잎새 벌써, 지금은 여름이란 뚜렷한 하夏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학교學校 앞 후천교 사변事變으로 무너졌던 그 다리, 오늘은 전前과 같이 고쳐 놓았다.
과연, 우리나라에도 저러한 큰 공예술工藝術을 가졌다는 데, 대對하여 지금의 문명국가文明國家인 미국인美國人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수업授業을 마친 후, 곧 읍邑에 가서 본즉 마침 장날이었다.
시장市場에는 늦게까지 소물 품小物品을 놓고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 민족民族 부모형제父母兄弟들, 남하南下한 우리 동지同志 2세국민
병二世國民兵, 다 죽어가는 얼굴로 며칠을 걸었는지 길가 더러운 쓰레기통 옆에 피로를 휴식休息하기 위하여, 그냥 그야말로 호흡呼吸만 없으면 천단인天壇人125과 같은 모습에 잠들고 있었다.
학습장學習帳 3권(8백환) 사다.
* 석가모니가 해탈解脫 고행하는 모습.
아버지의 일기 115
1951년(檀紀四二八四年)5월8일(五月八日)화(火)맑음
문을 열자 앞 냇가 버들나무126 솔솔 부는 그 바람에 넘실넘실 춤추고 어느새인지 공중 높이 떠돌아다니는 제비, 그 먼 강남땅에서 이 나라의 봄 경치를 보러 찾아온 그 수數많은 제비들, 전란戰亂으로 자기自己가 옛집을 짓고 한여름 동안 놀던 그 집 모두들 파被하여 지금은쓸쓸한 터만이 남아있어, 그들도 그 집이 그리운지 높이 날아다니다
가 그만 저 멀리 사라졌다.
나는 왜! 부끄러운 이름으로 입학入學하였는가? 왜!
모든 것이 후회막심後悔莫甚하다.
차라리 이러한 운명運命이 닥쳐온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입학入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고립적孤立的 생활生活 이것이 나의 취取할 방도方途가 아닌가?
* 버드나무의 경상도 사투리.
아버지의 일기 116
1951년(檀紀四二八四年)5월9일(五月九日)수(水)개임
작일昨日, 3천5백환에 나무 한 짐을 샀다.
주인主人 할머니께서 귀한 나물을 주시어 아침 조반朝飯을 유달리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본교本校 조회 시朝會時에 교장校長 선생님으로부터 교감校監 선생님께서 김천고녀金泉高女로 전근轉勤 가신다는 말씀을 하였다.
나는 슬펐다.
그 선생님 참으로 나의 형편形便을 잘 알아주시고 고립孤立을 좋아하시는 분이셨다.
또한 ‘용단성’ 극복克服할 수 있는 그 선생님께서 이 학교學校를 떠나신다는 말에 감개무량感慨無量하였다.
교육敎育시간에는 앞으로 10일 후에 교생실습敎生實習으로 읍국민학교邑國民學校에, 배치配置한다는 교장校長 선생님과 담임擔任 선생님으로부터 말씀이 있었다.
석반夕飯후, 재미나는 시조 몇 수를 외웠다.
아버지의 일기 117
1951년(檀紀四二八四年)5월10일(五月十日)목(木)맑음
우주자연宇宙自然 사四철 변變함 없이 돌고 돌아 앞뒤 텃밭 그 화창함을 자랑하던 온갖 춘색의 꽃나무, 어제인 듯하더니 벌써 그 나무에는 녹음을 자랑하고 있다.
금일今日은 식사당번食事當番이었다.
곧 우물에서 쌀을 씻으려니 마을 젊은 부인婦人네들이 아침밥 짓기에 모두 모여 물을 길렀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과 동시에 나의 신세타령이란 한 토막의 한심함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학교學校로 갔다.
오늘은 극장에서 영화映畵가 있기에 2시간을 마치고 곧 출발하였다.
발성기發聲器의 고장으로 몇 시간 동안 먼지투성이 속에서 기다리던 중, 결국 견학見學하지 못하고 돌아오다.
중식 후, 방房을 청결히 소제掃除127하였다.
* 청소.
아버지의 일기 118
1951년(檀紀四二八四年)5월11일(五月十一日)금(金) 맑음
완연完然한 여름이다.
동리洞里 사람들 모두들 상의上衣를 벗고 ‘난닝구’128만을 입고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떼를 지어 경지耕地를 찾아다니며 우물가에는 개구리의 음악音樂하는 소리 밤이면 요란하게 울고 있다.
침천정枕泉亭의 뒤 텃밭 한동안 그 사치함을 자랑하던 삼동 추, 지금은 결실結實을 준비準備하고 있다.
하교 시下校時 담임擔任 선생님으로부터 미납금未納金에 대對하여 말씀이 있었다.
나는 내 일생一生을 통通하여 아마 경제적經濟的 타격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집으로 오는 도중途中, 나는 담임擔任 선생님에게 나의 이 기막힌 사정事情을 말씀드리었다.
담임擔任 선생님 역시 나의 사정事情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면제할 수 있으면, 한다는 말씀에 나는 한갓 힘을 얻은 것처럼 기쁜 마음이 일어났다.
* 러닝셔츠.
(영남연합뉴스=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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