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이하여 총12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중이다. 제3편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망명을 결심한 뒤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심경을 노래한 한글가사에 대한 내용이다.
1911년 만주망명의 주역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아내이자 백하 김대락의 누이동생 김우락(金宇洛, 1854~1933) 여사가 지은 <해도교거사>라는 한글가사가 전한다.
이 가사는 김우락 여사가 만주망명 이후 서간도에 정착해서 지었다. 자신의 성장과정과 혼인이후의 삶, 남편의 구국운동 상황, 만주 망명과 정착 이후 삶의 이야기 등 자신의 일생 경력을 한글로 기록한 자료이다.
제목은 한글로 되어있지만 ‘해도’는 ‘海島’ 즉 (서)간도를 의미하고 ‘교거’는 ‘僑居’ 즉 임시거주를 의미한다.
기록 시기는 가사 말미에 “신해년(1911) 국화절(음력 9월 9일)에 단풍은 비단 같고 찬바람은 소슬하니 원객(遠客)의 시름일세, 심심하고 수란한 중에 심신이 어지러워 자리에 혼자 누워 공부 없는 짧은 문필로 자신의 경력을 기록하니 남이 볼까 부끄럽소.”라는 구절로 볼 때 대략 음력으로 1911년 9월 9일 경(양력 10월 29일) 또는 그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안동 서후면 금계마을 의성김씨 김세락의 딸로, 가일마을 안동권씨 권준희의 며느리이자 권동만의 아내인 김우모(金羽模, 1874~1965) 여사가 앞서 1934년에 만주로 망명한 두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1940년 망명길에 오르면서 지은 <눈물뿌린 이별가>라는 가사도 남아있다.
김우모 여사의 친정은 독립운동 명문가로 유명하다. 숙부 김회락은 김흥락과 함께 의병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총살당했고, 큰오빠 김양모는 의병에도 가담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둘째오빠 김원식은 만주에서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정의부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시댁 역시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리며 권오설, 권오상, 권오운, 권오직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일마을로, 시아버지 권준희는 광복회에 참여했고, 아들 권오헌 역시 신간회, 안동청년동맹 등에 가담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눈물뿌린 이별가>에는 고향과 벗을 이별하는 장면, 가족과의 해후에 대한 기대 등 애절한 심경이 담겨있다. 가사 말미에 “수삼 일이 지나가면 고진감래 되리라. 기차에서 내려가면 아들 손자 만날 수 있으리. 면면히 손잡으면 반겨 맞이할 일 미리 좋다.
그동안 쌓인 억만 회포 낱낱이 더하며 이야기 할 것이다.”라는 구절에서는 고향과 생이별 하는 고통도 있지만 만주에 있는 자식을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심경을 느낄 수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정종섭 원장은 “일제에 의해 나라가 무너진 상황에서 고향을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떠나는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 그들의 삶과 애환이 한글가사에 고스란히 남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근현대 기록자료를 발굴하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전했다.
최영태 기자 ynyhnews@ynyonhap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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